"여보, 아프지 않아요" 아리아와 파에투스(에픽테토스, 타키투스)



                 <유튜브 캡처>
 


아리아(Arria)의 희생적 행동과 스토아 철학의 이상은 고대 로마의 극적인 정치적·도덕적 장면 속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에픽테토스의 강의록(김재홍 옮김그린비 40)과 타키투스의 연대기(박광순 옮김범우, 416, 732)에서 전달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리아의 희생과 스토아 철학의 실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시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카이키나 파에투스(Caecina Paetus)와 그의 아내 아리아는 가문의 명예와 원칙을 지키려는 의지로 유명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카이키나 파에투스를 반역 혐의로 자살하도록 강요했는데이때 아리아는 놀라운 결단력을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이 고통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단검을 잡아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남편에게 단검을 건네며 "파에투스여아프지 않아요!"(Non dolet, Paete!)라고 말한다


이 짧은 말과 행동은 그녀의 용기와 헌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며가족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희생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플리니우스의 서간집과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램에서도 이 장면은 로마인의 이상적 덕목으로 묘사되고 있다.


니체는 이를 두고 '거룩한 거짓말'고 했다.


아리아의 이러한 행동은 단순한 개인적 희생을 넘어 스토아 철학의 핵심 원칙을 실천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 장면을 상상해 재구성해 보았다.


<칼은 그녀의 손에서 빛났다단검의 차가운 금속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 속에 묵직하게 울렸다아리아는 단단히 다문 입술 위로 슬며시 미소를 띠었다두려움도망설임도 없는 표정이었다그녀는 천천히 남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카이키나 파에투스는 앞에 놓인 칼을 바라보며 고통과 두려움으로 뒤덮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파에투스여,”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그러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할 수 없다면내가 먼저 보여주겠어요.”

파에투스는 아내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이미 늦었다아리아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금속이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흰 드레스 위로 붉은 피가 번져나갔다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질 줄 알았지만대신 차분한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단검을 뽑아 천천히 피 묻은 손으로 남편에게 건넸다.

아프지 않아요파에투스정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고 따뜻했다그녀는 남편의 손을 붙잡아 칼자루를 쥐여 주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명예를 지켜주세요.”

파에투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칼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아내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있었지만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아이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너무 잔인해당신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건 아니었어

아니에요,” 아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이름을 위한 일당신과 나를 위한 일이에요두려워하지 말아요당신은 해낼 수 있어요나는 믿어요.”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그녀의 손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파에투스는 칼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그의 심장은 온 몸에서 울릴 만큼 요동치고 있었다그는 잠시 칼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아리아의 창백해진 얼굴을 바라봤다그녀의 표정은 고요했다평온함 속에서 무엇인가를 확신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파에투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남아 있었다그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그녀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야 했다파에투스는 칼을 들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이 순간그는 두려움을 버리기로 했다그는 이제 그녀의 용기를 이어받아야 했다.

그리고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덕성그리고 감정의 극복을 중시하며고통이나 죽음조차 의연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이상으로 삼는다


에픽테토스는 강의록에서 죽음과 고통은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인간의 진정한 덕은 이러한 것들을 넘어선 이성적 판단과 행동에서 나온다고 설파한다


아리아의 행동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한 의연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녀는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는 모습을 통해 남편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이는 단순히 가족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당대 스토아 이상을 구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의 맥락에서 본 트라세아 파에투스의 죽음


아리아의 딸과 사위로 이어지는 스토아 철학적 정신은 트라세아 파에투스(Thrasea Paetus)의 삶과 죽음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네로 황제의 폭정을 반대하며 공공연히 독재에 맞서다가 66년 자살을 강요받았다


타키투스는 그의 최후를 전하면서트라세아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원칙을 고수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공포에 휩싸이는 대신 차분히 이성을 유지하며 자신과 가족을 위로했다.


특히 아내 아리아(Arria)는 남편과 함께 죽음을 택하려 했으나트라세아는 그녀를 말리며 "오래 살아주세요우리의 딸에게서 단 하나의 지주를 빼앗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모습은 스토아 철학이 가르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이성적 판단을 극명히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희생이 아니라개인적·도덕적 이상을 추구하며 국가 권력에 저항했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아리아의 희생과 트라세아의 죽음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이 로마의 혼란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도 빛을 발했던 순간들로 남아 있다


스토아 철학이 강조하는 이성적 태도감정의 통제그리고 도덕적 원칙을 고수하는 삶의 방식은 이들의 행동을 통해 생생히 드러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대 로마의 역사적 교훈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존엄성과 용기에 대한 본보기로 여겨진다.

프랑스 조각가 피에르 르포트르(Pierre Lepautre)는 1685~1695년 사이에 대리석 조각 아리아와 파에투스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의 Cour Marly에 전시되어 있으며, 고대 로마의 비극적 사랑과 희생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사진 맨위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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